국세청 성과공유대회에서 '감사패' 받아
“국선대리인으로 3건을 맡았었는데, 일부만 감액받고 납세자 스스로 포기한 1건을 제외하고 2건 모두 부과된 세액 전부를 취소받았다. 이때 유료로 사건을 맡았을 때보다 더 기뻤고 보람을 느꼈다.”
메마르고 각박한 사회, 어려운 납세자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따스한 납세 조력을 펼친 세무사가 있어 더욱 빛을 발한다.
거센 겨울바람이 몰아친 지난 6일, 서울 종로구에 소재한 '정순재세무회계사무소'에서 만난 정순재 세무사. 그는 국세청이 지난달 28일 처음으로 개최한 국선대리인 성과공유대회에서 영세납세자 권리구제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우수 국선대리인'으로 선정돼 감사패를 받았다.
2년이 훌쩍 지나 이제는 쓸모없는 자료가 된 사건의 서류를 마음에 걸려 아직까지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그의 모습에서는 약자의 아픔에 마음 아파하는 따뜻한 인간미가 엿보였다. 인터뷰 내내 힘든 이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마음을 보여준 그는 “보람이 있다”며 ‘내 일처럼’ 한다는 각오를 밝혔다.
국세공무원 출신인 정 세무사는 2018년 말 명예퇴직한 후 경험과 지식을 활용해 보람된 일을 해보겠다는 마음에 ‘종로세무서 영세납세자지원단’과 ‘국선대리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억울하게 세금을 부과받거나 부당한 처분을 받았음에도 경제적 사정 등으로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못해 구제받지 못한 납세자를 위해 무료로 도움을 주는 것이 국선대리인의 역할”이라고 소신을 밝혔다.
정 세무사는 올초 국선대리인으로서 종합소득세 부과 취소 결정을 받아낸 바 있다. 국세청이 세금계산서를 근거로 법인 대표 A씨가 무실적으로 법인세 신고를 한 뒤 매출을 누락했다며 종합소득세를 결정·고지한 사건이었다. 정 세무사는 법인이 발행한 세금계산서는 A씨 이전 대표이사가 공사 수행 후 발행한 것이며, 모든 소득이 전 대표이사에게 귀속된 사실을 입증해냈다.
그는 “쟁점을 봤을 때 이거는 뭘로 다퉈야 되겠다는 게 이제 하나의 습관이 됐다”라며 “(증빙 확보를 위해) 수십번 통화하고, 카카오톡 등으로 연락했다. 함흥차사로 답이 없어 답답한 적도 있었다”고 소회했다.
문제는 ‘실질 귀속자’ 여부. 청구인이 법인의 돈을 가져가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객관적인 근거를 찾아야 했다. 우선 법인을 인수할 때 받은 합의서가 있었다. 인수하기 전에 수주해 진행 중인 공사는 전 대표자가 책임지고 시공 완료하고 대금도 관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합의서로는 부족했다. 합의서대로 공사가 시행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공사계약서가 필요했는데, ‘전 대표이사에게 자료를 받지 못했고, 면허 취소로 법인이 폐업되며 자료가 사라졌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공사는 쌍방 간의 계약이니 발주자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무서 담당자의 협조를 구해 발주자를 확인했다. 확인 결과 서울 중구청과 송파구청에서 발주한 관급공사였다.
정 세무사는 “다행히 관급 공사여서 청구인에게 공사계약서를 달라고 하라고 말했다. 발주한 사람이 만약 폐업해 없어졌다면 찾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공사계약서로 계약기간, 공사기간 등 합의서의 내용이 확인됐다. 마지막 고비는 ‘그 돈이 누구한테 갔느냐’였다. 돈의 흐름은 ‘실질 귀속자’를 밝힐 결정적 단서였다. 청구인은 “법인이 폐업해 버렸고, 통장은 전 대표자가 관리하기로 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막막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정 세무사는 “은행에 가서 (통장 내역을) 받아와라 했더니 ‘내가 가도 되냐’는 말이 돌아왔다. 법인 대표자라는 사실만 입증하면 되는데 전혀 모르니까”라며 안타까운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때 또 한번의 행운이 찾아왔다. ‘대금 e-바로시스템’에 등록된 계좌였다. 대금 e-바로시스템은 서울시가 공정거래 유도와 사회적 약자 보호를 위해 서울시, 지자체, 산하기관에서 발주한 공사의 공사대금을 대금 e-바로시스템에 등록된 계좌로만 지급하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정 세무사는 “일반계좌가 혼용돼 있으면 자금을 찾기 어려웠을텐데, 시에서 지급한 공사대금이 하청업체·건설근로자들에게 지급되고 나머지 금액이 일반계좌에서 전 대표자한테 흘러간 것이 정확하게 나왔다”며 그 때의 기분을 소회했다. 이후 2월27일 국세심사위원회 회의를 거쳐 과세처분이 취소됐다.
그는 “신용불량자로 등록되고 사업도 하기 어렵고 여러 가지 피해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재산이 없다는 이유로 포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억울한 세금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문을 두드릴 것을 조언했다.
또한 “처음엔 몰라 과세했더라도 이만큼 입증 제시하면 (국세심사위원회 회의 단계까지 가기 전에) 취소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된다”며 후배 국세공무원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가 지난 2년간 국선대리인으로 맡은 사건은 이 사건을 포함해 총 3건이다. 그중 첫번째 사건은 그에게 애틋하게 남아 있다. 강원도 차밭의 복토 공사비에 대한 양도소득세 공제가 쟁점이었다.
공사계약서가 없었지만 비용 일부를 인정받고 잘못 적용한 부분도 찾아냈다. 그러나 마지막에 복토 공사 사업자에 세금 피해가 갈까 봐 결국 청구인 스스로 불복을 포기했다.
정 세무사는 “자료가 이만큼 많다”며 사무실 책장 위쪽 소중히 보관하고 있던 다량의 서류뭉치를 꺼내 보여줬다. 그는 “나이 드신 분이 너무 열심히 해주시고 (강릉까지 가서) 공문을 복사해 오고 열심히 자료를 떼다 줬다. 이게 제일 안타깝다. 눈도 질환으로 잘 안보였는데”라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몇 번이나 서류를 뒤적였다.
그는 2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미안하고 안타까운 감정을 생생히 떠올렸다. “나중에는 미안했다. 노인네들 몸도 안 좋은데 내가 고생시켰나 싶어서. 시간 되면 현장 답사하러 같이 가자고 했는데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고”라며 말문을 흐렸다.
그는 “몇 번이나 만류했지만 고민하더니 ‘편하게 마음 부담을 덜겠다’며 본인이 취소해서 더 이상 할 수 없었다”며 “이제는 쓸모없는 서류다. 서류를 버려 달라는 말에도 그래도 버리지 못해 갖고 있다”고 말했다. 가장 마지막에 제출한 서류의 첫장에는 2022년 12월이라는 날짜가 선명했다.
2022년 7월에 맡은 두 번째 사건은 이혼 소송을 밟고 있던 배우자가 신청인 명의로 사업하고 폐업해 세금이 부과된 사건이었다.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의 행동에 제동을 걸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이혼 소송 확인과 경리직원과의 대화 내용 등을 토대로 남편이 실제 사업한 사실을 입증해 억울한 세금을 취소했다.
정 세무사는 2026년까지 2년간 국선대리인으로 더 활약한다. “(국선대리인 일이) 매번 있는 건 아니지만 시간을 많이 뺏긴다”면서도 “납세자의 억울함을 해소해 줬을 때 보람을 느낀다. 서울청 납세자보호담당관실에서 조세불복 담당업무를 3년 했는데 주장을 이렇게 하면 인정받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느낄 때가 많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국선대리인으로 또다시 지원한 동기와 앞으로의 각오를 묻자 울림있는 대답을 들려줬다. “국선대리인으로 지원했을 때와 마음은 변함이 없다. ‘조금이라도 남한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름대로 보람이 있는 거 아니냐’는 각오로 했으니까. 똑같은 각오로 내 일처럼 해야죠.”
[프로필] △동부산·중부산·부산진세무서 △국세공무원교육원 △강남세무서 법인세과 △서울지방국세청 조사2국 정보관리과 △종로세무서 부가가치세과 △국세청 조사2과 △역삼세무서 법인세과·조사2과 △송파세무서 조사관리팀장·법인세과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2과 조사반장 △부천세무서 재산세과장·조사과장 직대 △서울지방국세청 납세자보호담당관실(심사1팀장) △영등포세무서 개인납세3과장 △정순재세무회계사무소 대표세무사(現) △상훈-모범공무원(2010년), 대통령표창(2016년), 녹조근정훈장(2019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