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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4.03.29. (금)

[기고]租稅裁判의 안타까운 辯論 場面

김면규 세무사

조세재판을 많이 지켜봤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필자가 재판의 당사자인 원고로서 직접 소장을 쓰고 변론을 하는 소송을 진행해 보았다. 그 청구취지는 금융소득(이자·배당)의 종합소득세 부과 취소에 관한 소송이었다. 전심절차로서의 처분청에 대한 경정청구와 조세심판원의 심판(기각)을 거쳐 本 訴에 이르게 되었다.

 

필자는 평소에 법관을 존경하고 사법부의 판결을 신뢰해 왔다. 그러나 이 번 소송을 통하여 재판에 대한 아쉽고 섭섭한 시민으로서의 감정을 토로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청구사실과 주장은 이러하다. 우리나라 소득세 제도는 종합과세제도이다. 따라서 퇴직소득과 양도소득만 각각 분류하여 과세하고 그 밖의 모든 소득은 하나의 과세 단위로 종합하여 과세한다는 내용이다. 종합하는 소득 중에는 이득이 나는 것도 있지만 손실이 나는 것도 있는 경우에 이것을 종합한다는 것은 이득과 손실을 加減하여 차익이 나는 것을 소득이라 하고 손실이 나면 결손금이라고 한다. 현행 소득세법령은 이러한 종합과세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소득이 있다. 다름 아닌 금융소득 중 파생소득이라고 일컫는 “집합투자기구로부터의 이익” 이른바 “펀드소득”이다. 펀드소득을 배당소득으로 의제(擬制)함으로써 배당소득은 필요경비가 발생되지 않기 때문에 손실도 있을 수 없다는 세법 논리이다. 그리하여 당해 연도에 이득이 생긴 금액은 모두 합산하고 손실이 생긴 금액은 합산하지 아니하여 즉 이득금액에서 손실금액을 상계하지 아니한 채 종합과세 소득금액을 계산하여 과세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펀드 투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결과이다. 펀드 투자는 투자 종목에 따라 같은 과세기간에도 이득과 손실이 수없이 반복되어 발생하는 것으로서 전통적인 배당과는 그 개념이 현저히 다른 데도 불구하고 배당으로 의제하여 손실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이와 같은 청구주장을 담아 제1심 법원에 소장을 내고 첫 변론 기일에 출석하였다. 재판장은 먼저 피고(세무서 소송수행자)에게 물었다. “현재 소장에 쓰여 있는 것처럼 과세하고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예. 그렇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다음으로 원고인 필자에게 물었다. “원고도 그렇게 과세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까?” “예.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이런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가면서 생각하니 재판장은 이렇게 과세하는 현실을 모르고 있었거나 그 내용을 숙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재판에 임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첫 번째 변론이니까 그럴 수도 있을 법한 일이긴 하다. 문제는 그 다음 원고에게 하는 얘기가 안타깝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낸다는데 내시지 뭘 그러십니까?” 하는 것이었다. 원고가 세무사란 사실만 알았어도 그렇게 얘기는 안 했을는지 모른다.

 

법관은 법률에 근거하여 얘기하고 판단해야 되는 것일진대 속(俗)된 이야기 거리로 소송 당사자에게 변론을 종용하는 것은 법관으로서 잘못된 재판자세라고 느꼈다. 이에 원고는 법관이 이 사건을 깊이 있고 성실하게 심리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눈치채고 더 이상의 변론을 포기하고 결심을 하게 되어 기각 판결을 받았다.

 

다음으로 고등법원에 항소장을 내고 또 첫 재판에 출석하였다. 이 때의 재판장은 소송 당사자에게는 아무런 질문을 하거나 변론의 시간을 마련해 주기 전에 재판장이 서론적인 얘기를 펴 나갔다. 그리하여 원고인 필자가 “재판장님. 원고도 한 마디 할 기회를 주십시오” 했더니 “말해 보세요” 하는 허락을 받아 이미 항소장에 기재한 주장을 간단하게 요약하여 말했더니 재판장은 대뜸 “그런 말은 국회에 가서 고쳐달라고 하시오” 하는 것이었다.

 

원고는 또 한번 재판장 앞에서 무색한 꼴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배당소득의 범위는 시행령에서 규정하였으므로 명령(시행령)이 법률에 위반되는 여부는 법원이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의 논의조차 봉쇄해 버린 법원의 처사는 아쉽기도 하고 얄미운 감정을 쉽게 버릴 수가 없었다.

 

항소심도 더 이상 변론을 요구할 수도 없기에 당해 법원에 위헌법률심판청구를 했다. 헌법재판소의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보자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당해 법원은 이 청구마저 기각결정을 내렸다. 그리하여 법원의 재판에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되어 상고심도 포기한 채 헌법재판소에 직접 헌법소원을 했다. 헌법재판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변론을 하지 않고 서면에 의한 법률심리만으로 종결한다. 그리하여 얼마나 기다렸는지 심판결정문이 왔다. 그 주문은 “기각”이다. 원고는 그 이상 다툴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누구의 말처럼 더 이상 하늘나라로 가버렸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유에도 얄미운 대목이 나타나 있다. 청구인은 당해 법률이 헌법(재산권 보장의 원칙, 형평성의 원칙)에 위반되는 사항을 지적한 데 대하여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리를 전개하기 보다는 “법률은 이를 제정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국가적 사회적 타당성을 종합하여 입법한 것이므로 위헌성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논리로 기각하여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법률은 입법과정에서 그 타당성을 검토하고 숙고하여 제정되었을 터인데 구태여 위헌법률심판을 왜 하는지 되묻고 싶은 마음이다.

 

 

 

※ 외부기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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